이러한 왕과 후궁과의 관계는 비단 국내 드라마상에만 보여지는 것은 아니다. 뮤지컬을 영화화한 1956년작 <왕과 나 (The King and I)>는 시암(현재의 태국) 왕(율 브리너 분)과 왕실 아이들에게 영어와 선진문물을 가르치기 위해 초청한 영국인 교사이자, 젊은 미망인 안나(데버러 커 분)와의 사이에서 벌어지는 이야기가 중심구조다.
이 영화는 지난 1999년 다시 <애나 앤드 킹 (Anna And The King)>라는 제목으로 각색되어 개봉하기도 했다. 사이암 왕국의 뭉쿳 국왕(주윤발 분)이 자신의 자녀들을 근대화된 서구 교육을 시킬 목적으로 영국인 미망인 애나 레노웬스(조디 포스터 분)를 왕실 가정교사로 초청한다는 줄거리는 1956년작과 동일하다.
이 두 영화에서 왕과 애나가 모두 최고의 갈등구조를 보여주게되는 요인은 바로 왕의 후궁인 '팁팀'이다. 후궁으로 간택된 팁팀을 끝까지 사모하던 팁팀의 옛 연인과의 관계가 들통이 나면서 이에 대한 왕의 냉혹한 모습에 애나가 실망을 하고 사이암을 떠나기로 결정하는 대목이다.
18세기 영국인 즉, 서구인의 시각에서 수 많은 후궁을 거느린 동양의 한 왕의 군주적인 모습과 태도에 대한 실망이라고 할까!
조선시대에도 국왕들은 정비를 포함해 수 많은 후궁들을 거느렸다. 이방원이라는 이름으로 더 잘 알려져 있는 조선의 3대 국왕인 태종(太宗, 1367~1422 / 재위 1400∼1418). 아버지 이성계 휘하에서 구세력 제거에 큰 역할을 하였으나, 세자책봉에 불만을 품고 정도전 등을 살해하는 왕자의 난을 일으킨 바가 있다.
이 태종의 정비는 민제의 딸인 원경왕후 민씨다. 태종은 원경왕후 민씨외에도 12명의 후궁을 따로 두었다. 태종과 원경왕후 민씨는 헌릉(사적 제194호 / 서울시 서초구 내곡동)에 묻혔다. 왕과 정비의 무덤은 '릉'으로서 보호되고 유지되지만 수 많은 후궁들의 묘는 어디에 있을까?
현재 확인되고 있는 조선왕릉은 42기(북한소재 2기 포함), 원은 13기, 묘는 64기이다. 릉(陵)은 왕이나 정비 혹은 계비의 무덤, 원(園)은 세자나 세자빈, 후궁의 무덤, 묘(墓)는 일반적으로 후궁의 무덤으로 분류된다. 그러나 이러한 구분에도 들지 못하는 후궁의 묘도 있다. 규모도 작고 찾기가 쉽지 않은 무덤이다.
그 중에 하나가 바로 태종의 12명 후궁 중 하나인 선빈 안씨(? ~ 1468년)의 묘다. 태종의 가계도를 살펴보니 선빈 안씨는 왕자인 익녕군을 낳았다는 기록이 있다. 그러나 묘의 규모로 보면 일반 봉분규모에 불과하다. 다만 이 묘가 오래되었다는 것을 증명하는 것은 540년 된 석등과 비석이다. 이 묘 주위에는 작은 안내석만이 이 자리가 태종의 후궁 묘라는 것을 알리고 있을 뿐이다. 동네사람이 아니면 쉽게 발견하지 못하는 곳이다.
세종에 의해 숙선옹주로 봉해진 선빈 안씨의 묘자리는 경복궁을 바라보는 서북향으로 조성되어 있다. 묘자리에 올라서면 아래로 민가가 내려다 보인다. 그 옆으론 새로 지어진 교회 건물이 묘자리를 내려다 보고 있다. 540년 동안 조용한 안식을 누리고 있는 선빈 안씨 숙선옹주의 묘는 십자가만이 지켜주고 있을 뿐이었다.
540년 동안 후궁의 묘를 지켜온 비석이 묘자리 뒷편에 그대로 버려진 채 방치되어 있다.
